[필리핀(6)] 마닐라 산티아고 요새 Fort Santiago

필리핀 마닐라, 산티아고 요새

[필리핀(6)] 마닐라 산티아고 요새 Fort Santiago

국외여행/필리핀 Philippines


숙소에서 한참을 쉬면서 한 낮, 마닐라의 더위를 피했다.
마닐라의 6월 한 낮 햇볕은 쉽게 우리를 지치게 할 것 같았고, 그런 무더위를 뚫고 마닐라에서 꼭 방문해야 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숙소에서 여유롭게 쉬면서, 또 넷플릭스에서 JTBC의 최강야구를 보며 느긋하게 연휴 다운 연휴를 즐겼다.

오후 5시쯤, 본격적으로 마닐라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관광지가 거의 없는 마닐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볼만한 곳이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었다.

숙소가 있는 ‘SM몰 오브 아시아(SM Mall of Asia)’ 근처에서 산티아고 요새까지는 그랩을 타고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있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랩 비용이 비싸지 않아 편하게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저녁이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지만 오히려 우리 일행처럼 한 낮의 뜨거운 햇살을 피해 오후 늦게 요새를 찾은 관광객이 많이 보였다.
요새라고 해서 도착하자마자 큰 성곽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시원하게 펼쳐진 넓은 공원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이 공원을 지나 요새로 갈 수 있었다.
오히려 큰 성곽이 눈 앞에 펼쳐졌다면 조금은 위축이 될 것도 같았는데 이렇게 평화로운 공원이 넓게 펼쳐져 안도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늦은 오후, 공원을 산책하듯 걸어 요새로 가보기로 했다.

공원 입구에서 현금으로 입장료를 지불하고 공원으로 입장했다.
필리핀 현지인은 50페소(약 1,200원)로 입장이 가능했는데 이런 차별은 여행을 자주하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납득이 될만했다.
다만 너무 큰 금액의 차이가 아니라면 좋겠는데, 25페소(600원) 차이라면 그리 큰 차이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그런데 또 50% 할증이라고 생각하면 큰 비중 같기도 하고 그랬다.

1571년에 건설된 요새로, 스페인 향해사이자 당시 이곳의 주지사였던 미구엘(Miguel Lopez de Legazpi)이 필리핀에 새로 건설된 도시 마닐라를 위해 만들었다.
처음 건설 용도와 다르게,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감옥으로도 사용되면서 요새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필리핀의 국민영웅 호세 리잘이 1896년에 처형되기 전에 이곳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면서 역사적으로 더욱 의미 있는 공간이 되었다.
요새의 둘레가 600m 정도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인 만큼, 충분히 시간을 들여 천천히 둘러 보면 좋을 요새이다.

운영시간 : (월~금) 오전 8시 ~ 오후 11시
입장료 : 외국인 기준 75페소 (약 1,800원)

공원으로 입장을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공원을 가로질러 요새로 향했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면서 그냥 갑자기,
얼마전 JTBC에서 방영한 싱어게인2, Top6 결정전에 앞서 펼쳐진 패자부활전에서
김소연이 부른 얼음요새 (원곡 : 디어클라우드, 2007년)노래가 생각이 났다.

공원은 활기차고 밝고 또 생기가 넘쳤지만, 나는 조금 차분해지려고 노렸을 했었는가 보다.
김소연이 낮은 목소리로 얼음요새 가사를 하나하나 짚어가는 모습과 그 멜로디, 그리고 그 음색이
내가 요새로 향하는 동안 귓가에 계속 맴돌았는데, 다소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플레이리스트에 늘 담아두고 가끔씩 꺼내 듣는 곡이 되었다.
곡은 곡대로, 또 그 노래를 들으면 이때 이 공원을 걷던 발걸음과 날씨, 향기와 바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참 좋다.

탈락과 또 다른 기회의 앞에서
김소연이 부른 얼음요새는 정말 너무나도 간절하고 또 애틋했던 것 같다.

넓은 공원에는 사람들이 모여 춤도 추고 영상도 촬영하고 있었다.
무슨 광고 촬영 같기도 하고 축하 영상을 촬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래나 저래나 사람들 표정이 모두 밝고 활기차서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절로 흥이 전이되는 것 같았다.

공원 끝에 있는 요새 입구에 도착했을 때
요새 앞의 큰 나무 아래에서 버스킹을 하는 거리의 악사도 만날 수 있었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애써 이곳 마닐라 그리고 요새를 찾아 준 나와 내 동행을 환영해주는 노래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공원을 잠시 걸으며 느꼈던 점은,

마닐라는 분명 가볼만한 관광지가 충분하지 않은 여행지, 도시이지만
이렇게 구석구석 숨은 마닐라 사람들의 흥과 여유가 있는 곳임은 분명했다.

요새 입구에는 큰 해자(垓子, moat)가 있었다.
앞서 공원을 지나오면서 내가 요새를 방문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잠시 있었던 것인지,
요새를 건설할 때 그 목적을 다하기 위해 고민을 했다면 이곳에 해자가 있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았다.

방어를 목적으로 건설된 성이나 요새에는 늘 해자가 있었다.
당장 떠오르는 성이나 요새를 얘기해보자면, 오사카의 오사카성이 그랬고, 런던의 런던 타워가 그랬다.

하지만 방어의 목적이 아니라 주거의 목적이었던 경복궁에는 해자가 없다.
경복궁은 침략에 대비하여 지어진 성이 아니라 왕이 거주하기 위해 만든 궁궐, 집이었던 것이다.

해자를 지나 요새의 입구에 닿았다.
기념 사진을 찍고 요새 안으로 향했다.
주변으로 성벽이 검은 이끼를 안고 있어 검게 보이는 것과 달리 성 입구는 관리를 하는 것인지 하얀 색을 발하고 있어서 대비가 되었다.

요새 입구로 들어서면 다시 넓은 광장이 나타난다.
잔디로 잘 가꾸어진 광장,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이다.

이곳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곳에 필리핀의 영웅 호세 리잘의 동상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작게 보이지만, 광장 안쪽에 세워진 동상이 그의 동상이다.

내가 찾았을 때에도 몇몇의 관광객이 동상 앞에 모여 그를 기리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광장을 앞에 두고 오른쪽에는 라자 술라이만 극장(Rajah Sulayman Theater)이 위치해 있다.
과거 스페인군이 주둔하던 때에 장교의 숙소(BOQ, Bachelor Officers’ Quaters)로 사용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1층 기둥과 벽면만 남아 있는 유적터가 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이곳에 숙소 건물이 있었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고 잘 가꾸어진 바닥과 예전 건물의 바닥만으로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옛 장교숙소를 나와 요새의 안쪽으로 더 들어가 봤다.
다시 큰 건물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이 건물은 무너지지 않고 잘 관리가 되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보여 우리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건물 이름이 Baluarte de Santa Barbara, 산타 바바라 보루(堡壘)였다.
요새 안에 보루를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를 했던 건물 같았다.
앞에 정복을 입은 직원들이 있었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딱히 제재를 하거나 수색(?)을 하지는 않았다.

이 건물의 역사를 알아보니,
1593년 목조 플랫폼으로 처음 건설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했다.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장소와 건물이었던 것이다.

15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그 역사가 정말 오래 된 것이 체감이 되었다.
처음 이 보루는 화약고로 사용이 되었다. 그러다 스페인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 주변에 요새를 둘러 규모를 키우고 군사적으로 활용을 했다고 한다.
1609년에는 포병대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가 그 이후에는 지하감옥으로도 사용되기도 하면서 용도가 자주 바뀐 모양이다.

1904년 미군이 점령하면서는 군본부를 설치하기도 했고 1942년에는 일본이 점령을 하기도 하며 세계대전에 다시 화약 저장고가 되기도 했다는데,
주인도 여럿 바뀌고 용도도 바뀌는게 참 이 건물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은 알겠지만
알면 알수록 이 건물의 운명도 참 기구하구나 싶으면서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산타 바바라 보루 건물을 나와 이어진 길로 요새의 안쪽 더 깊숙이 이동했다.
반지하로 보이는 건물의 아랫쪽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보였다.
우리 앞에서 들어가볼까 말까 망설이는 여성 관광객 2명의 모습도 보였는데,
입구가 유독 좁고 작아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몸을 낮춰야 했던 것도 있지만 유난히 응큼해 보이는 것이 뭔가 발길을 멈추가 해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탓도 있었다.

나와 함께 이 곳을 찾은 선배는 참 모험심이 강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에 거침이 없는 분이지만
이곳 입구에서 잠시 서로 멈칫하며 여기도 들어가 보는게 맞는지 서로 눈을 맞추어 의견을 조율해보기도 했을 정도다.

그만큼 분위기가 스산했다.
뭔가 소름이 조금 돋기도 할 정도로.

그렇게 몸을 숙여 건물 안으로, 반지하 정도를 걸어 들어왔다.
내가 막 입구를 통과한 후 다른 관광객들도 이어서 이곳에 방문하고 있었는데,
사진으로 봐도 입구가 좁고 낮아서 사람들이 충분히 몸을 낮춰야 출입이 가능한 모습이었다.

잠시 몸을 추스리고 정신을 차려 건물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왜 이 건물에서 이렇게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졌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비록 인형과 모형이었지만,
일본군이 포로들을 감시하고 고문하는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이 일본군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다는 것과 함께 잔혹한 고문도 함께 펼쳐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입구가 왜 이렇게 좁고 낮았는지, 그러고 보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일본군이 체격이 그리 크지 않아서 그들에게는 크게 불편함이 없었겠다는 생각과 함께
포로들이 동시에 많이, 그리고 빠르게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필리핀의 여름은 엄청 습하고 덥다.
섬 나라이기 때문에 습도도 습도지만 동남아의 여름 열기는 정말 상상 그 이상이다.
그래서 이곳에 수감된 여러 전쟁 포로들이 심한 고문을 받고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로 이 무더위에 감옥에서 많이 죽어갔다고 한다.
전쟁은 정말이지 이런 참혹하고 잔인한 모습을 많이 남기는 것 같다.

정말 잔인하고 참혹한 사진이다.
이곳에서 사망한 포로들을 적절한 사후 처리 없이 그대로 방치를 하거나 주변 하천으로 치워버렸던 것 같다.
참 많은 한(恨)이 서려 있을 장소이고 역사적 장소에 와 있는 듯 했다.

이런 생각으로 계속해서 이곳을 탐험하고 있었는데
벽면 한쪽에 이런 안내 문구가 걸려 있었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품위를 지키고 존경심을 가져달라는 안내문구였다.
신성한 곳,
그러고 보니 필리핀 사람들은 이곳을 개방하고 관광객들에게 소개할 때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좀 더 고결한 장소인 것으로 얘기하는 것 같다.
이곳을 차갑고 잔인하고 스산한 장소로 인식을 한 것은 내 개인의 편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문구를 보며 되돌아 봤다.

감옥은 길이 좁고 천장이 낮았다.
나와 저 아이는 키가 작아서 참말로 다행이었지만 조금이라고 크가 큰 사람들은 여지 없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번 하고는 이동을 해야 했다.
저절로 겸손해지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중간 중간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일본 군인의 모습
키도 복장도 표정도, 정말 사실적으로 잘 만들어 두어서 이곳을 구경하는 동안 몰입감이 상당했다.
한편으로는 이게 모형이라서 참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지하감옥을 한바퀴 둘러보고 다시 자유를 향해, 지상으로 향했다.
여지 없이 감옥을 탈옥하는 방법은 지상으로 뻗은 계단을 올라 지하를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잠시였지만 이 순간이 참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을 모든 분들과 영혼을 대신해 한 발 한 발 힘을 주어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나는 자유 갈망하는 마음을 한껏 담아 다시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하 감옥을 벗어나 마주한 것은 산티아고 요새의 가장 안쪽, 산타바바라 담벼락(Falsabraga de Santa Barbara)이었다.
마닐라 파시그 강(Ilog Pasig, Pasig River)과 경계를 이루며 우뚝 서 있는 이 담벼락은 여기 산티아고 요새의 가장 바깥 성벽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작지만 작은 마당 같은 광장이 있어서 파시그 강을 조망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마치 마닐라 서쪽 저편으로 해가 넘어가며 붉은 노을을 만들어 주고 있어 분위기가 꽤나 멋있었다.

파시그 강은 마닐라를 가로지르는 강이다.
서울의 한강, 부산의 낙동강과 같은 역할을 하는 강이다.
산티아고 요새는 이 파시그 강 하구에 위치해 있다.

산티아고 요새에서 파시그 강을 바라보는 모습은 한강공원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것만큼 운치가 있지는 않았는데,
우선 파시그 강이 그리 깨끗한 모습이 아니어서 다양한 쓰레기와 부유물이 강을 타고 하류로 흘러가는 모습 때문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실제로 강에 떠내려 오는 쓰레기를 줍기 위해 작은 뗏목을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가며 강을 거슬러 쓰레기를 줍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강이 그리 깨끗하지 않다 보니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악취가 코끝을 스칠 때도 있었다.
마닐라가 관광지로 유명하지 않은 이유가 이런 불편한 도시 인프라와 자연환경도 한 몫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강 건너 주택가 모습이 필리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어느 빈민가의 모습이기도 해서
이곳에서의 조망이 그리 즐겁지 만은 않았던 것 같다. (측은한 마음을 가진게 아니라 그냥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지하감옥을 막 빠져나와 지친 몸을 잠시 쉬어가기는 좋았지만, 멋진 풍경과 조망을 기대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부는 요새 아래에 있는 전망대로 내려가 파시그 강과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여유로운 모습과 대조적으로,
강 위를 뗏목으로 떠 다니며 쓰레기를 회수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여, 나에게는 그저 많이 낯선 풍경만 만들어 낼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시선을 돌려 요새를 다시 마주했다.
눈 앞에 놓인 작은 광장 같은 마당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강 바람에 잠시 더위를 날리고 다시 요새의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요새 입구로 돌아가는 길은 들어올 때와는 다른, 성벽길을 타고 가보기로 했다.
방어의 목적으로 지어진 요새이기 때문에 이렇게 성벽 위에는 병력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길 입구에는 오랫 동안 이 길을 지키고 서 있었을 병사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의 모습이 많이 어색했을 것인데 별 문제 없이 나와 내 일행을 성벽으로 이동하게 허락해준 병사였다.

성벽 좌우로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예전 요새가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을 때에는, 분명 방어를 위해 이런 숲을 다 없애버렸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조용히 산책하기 좋게 잘 가꾸어진 숲이 좌우에 성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덕분에 천천히 숲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며 탐험을 이어갈 수 있었다.
길은 돌 바닥이었지만 걷기에 무리가 없을 만큼 돌 사이사이를 시멘트로 잘 보수를 해 뒀고,
가끔 만나는 돌다리도 성벽과 성벽을 충실히 이어주고 있어서 성벽을 걷는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요새 외곽을 크게 돌아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아까 지나 왔던 장교들의 숙소, BOQ도 지나가며 성벽 위에서 건물을 한 번 더 관찰할 수 있었다.
규모가 꽤 큰 건물이었다는 것을 성벽 위에서 바라보며 추측할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사람 조형물이 있어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런 모습이 건물을 더 살아 있게 만들어 싫지만은 않았다.

성벽은 파시그 강을 따라 요새 입구까지 이어졌다.
파시그 강이 조금 더 깨끗했더라면, 저기 저 둥둥 길을 잃고 떠 도는 부유물만 조금 적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성벽을 타고 나를 계속 따라 다녔다.
바로 옆 빈민촌은 아랑곳 않고 우뚝 솟은 높은 빌딩들이 이곳과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성벽길을 따라 처음 요새에 들어섰던 곳, 해자가 있는 요새의 입구까지 와버렸다.
갈 때는 요새 깊이 파고들어 하나하나 체험을 했었다면, 돌아 나올 때는 성벽 길에서 한 발 짝 떨어져 오새를 탐험할 수 있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지 않고 성벽을 타고 입구로 걸어 나오길 잘 한 것 같다.

성벽 끝에는 또 이렇게 작은 휴식 공간이 있어서 잠시 앉아서 쉬었다.
이 곳이 성벽 입구를 방어하는 또 다른 보루(堡壘)의 지붕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처럼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그늘에서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 요새를 벗어나기 전에 여기저기 마지막 요새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시간을 즐겼다.

요새의 입구는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참 이쁜 아치를 그리며 방문객을 환영하고 또 배웅해주고 있었다.
이곳이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만큼, 이 예쁜 아치형 출입문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환영하고 또 배웅을 해주었을까

요새를 벗어나면 다시 아까 지나왔던 공원과 이어진다.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즈음이 되어서 그런지 이제 활기찬 공원의 모습은 사라지고 차분하고 조금은 근엄해진 공원의 모습이었다.

공원 입구에 카페가 있어서 잠시 땀도 식히고 목도 축이며 휴식을 가졌다.
공원에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우리처럼 여기 카페에 앉아 또 다른 시간과 추억을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카페 이름도, 어쩐지 Chamber(회의실)라고 하더니, 그 이유가 다 있는 듯 했다.

회의를 하기 참 좋아 보이는, 하지만 조금은 불편할 것 같은 의자도 이 카페 이름에 최선을 다해 부합하는 중이었다.
이곳에 앉으면 절로 등이 굽어지듯 몸을 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잠시 쪽잠이라도 자야 할 것 같아, 나는 여기에 잠시 앉은 후 금방 일어나 자리를 옮겨야 했다.

어딜가나 차가운 커피는 옳은 정답을 내어준다.
한국에서 나는 삼복더위에도 늘 (따뜻한 것을 넘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마신다.
하지만 여행을 왔으니 잠시 비행을 저질러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으로 따신게(hot) 아인, 찹은(iced)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기도 한다.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요새를 걷는 동안 조금은 무덥고 목이 말랐던 것일까,
마닐라 챔버 카페(Chamber Cafe)에서 마셨던 이 차가븐 아메리카노는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을 만큼 꿀 맛 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낯선 이방인이,
외진 곳에서 행여나, 혹은 어쩌면 길이라도 잃지 않을까
여행 중 이렇게 친절하게 나가는 곳을 안내해주기라도 한다면 나는 또 그렇게 든든하고 반가우면서도 여행지에 대한 포근한 인상을 남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여유롭게 휴식도 취하면서 체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공원을 막 나서려는데 어둠이 내린 공원이 대낮 같이 밝은 모습이었는데
주렁주렁 나무에 또 이렇게 예쁜 등을 달아 두어 이 감성에 충분히 적셔질 수 밖에 없었다.

마닐라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미약한 도시이건만
짧게 머물면서도 잊을 수 없는 추억과 감성을 흥쾌히 선사해주는 도시임에는 틀림 없었다.

공원 입구를 나오면서도 발길을 멈추고 돌아보게 하는 매력
그 것이 이곳 산티아고 요새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덕분에 잘 머물고 잘 구경하고 돌아갑니다.

2023.06.04

Latest Posts